이선옥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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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그라데이션: YTN의 최남수씨를 보며



                                                                                                                           이선옥

 

YTN 노조의 싸움은 다른 언론사와 결이 다르다. 보도전문 채널이지만 세금이 투입되는 국가기간통신사도 아니고, 공영방송인 KBSMBC처럼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 등을 통해 정부가 구조적으로 개입할 수도 없다. 하지만 공기업들이 대주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구조여서 사기업으로 보기는 어렵다. 공영도 민영도 아닌 모호한 지위는 정권이나 자본가처럼 선명하게 전선을 그을 상대가 없다. 하지만 이 강소 채널이 가졌던 위상은 공영방송 만큼이나 언론지형에서 중요하므로 정권의 지배욕망은 비슷하게 작동했다.

2008년 이명박 캠프의 특보였던 구본홍을 사장으로 내정하면서 YTN 노조의 낙하산 반대 공정방송 사수투쟁은 시작됐다. 400명 정도의 규모인 조직에서 수많은 징계자가 나왔고 6명은 해직됐다. 이들 가운데 3명은 2014년 대법원 판결로 복직됐지만 나머지 3명은 대법에서도 패소해 무려 9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YTN 노조의 싸움이 다른 언론사와 결이 다른 것은 지배욕망은 똑같이 작용하는데 상대가 KBSMBC의 사측과 지배구조의 장악자들처럼 선명한 불의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는 장악하려는 쪽보다 저지해야 하는 쪽에게 더 어렵다. 최남수의 사장 응모와 선임과정을 보면서 불의의 모습이 선명할 때보다 채도만 다른 채 섞인 그라데이션일 때 더 힘겹다는 걸 느끼게 된다. 아마 해직자 6명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난 9년동안 YTN 노조가 쉬지 않고 벌인 싸움을 알지 못한 채 지났을 것이다. 주식회사의 외피를 두르고 주총에서 사장을 최종 선임하는 이 기업체는 구성원들의 공정방송 싸움만 지우면 여느 사업장의 노사대립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주목받기 어렵다.

 

선명하게 악한 적이 불의를 휘두르면 누구나 두려움을 먼저 느낀다. 하지만 그라데이션 같은 불의의 경우는 좀 다르다. 이 악의 정체를 나만, 혹은 우리만 알고 있다는 우려, 옅은 채도에서 선명한 채도까지 범위가 넓은 악의 자리에서 내가 인지하는 지점과 타인의 지점이 다를 거라는 불안은 고립에 대한 공포를 불러온다. 두려움에서 오는 공포와 불안에서 기인한 공포는 결이 다르다. 선명한 불의는 타격의 방식이 극단적이어서 당하는 쪽도 고통의 시간과 크기에 비례해 정당함이 쌓이고, 불의에 맞선 패배에는 나름의 명예도 따른다. 진다 해도, 탄압을 받아도 그 정당함이 견디는 힘이 되어준다.


하지만 선명하지 않은 불의는 내부 구성원들이 먼저 악함에 동의하는 범위와 강도가 다 다르기 때문에 어렵다. 옅은 지점의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은 가장 선명한 지점에 선 이들이 자신을 비난한다 여기기 쉽고, 선명한 지점에 선 이는 채도 낮은 문제의식을 불의의 편에 선 거라 오해하기 쉽다. 여러 심리가 복잡하게 교차하기 때문에 내부의 결속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외부의 지지여부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구성원들의 불안을 파고들어 단결에 균열을 내는 이간질에 대응해야 하고, 고립된 싸움을 피하기 위해 외부의 지지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노조의 집행부에게는 겹겹의 대응이 필요한 싸움이다.


이번 과정에서는 그동안 없던 새로운 장벽 하나가 더 생겼다. 사장 선임 과정의 파행과 사추위와 이사회의 행보를 두고 현 정권의 개입도 작용했을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노조 안팍에서 언급되었다는 이유로 예전의 지지자들이 날선 비난을 하며 등을 돌렸다. 공정방송을 위해 싸운 지난 세월동안 든든한 우군이었던 시민들 중 일부는 더 이상 선명한 지지자가 아니게 됐다

어떤 권력이든 줄을 대려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고, 특히 지금처럼 급격하게 권력이 바뀌는 경우 혼란을 틈 타 모호한 부적격자들이 운 좋게 낙점될 가능성도 있다. 현 정부의 인사검증 과정에서 소홀함이 드러난 사례들은 여럿 있다. 정권이 낙하산 인사를 꽂으려 했다는 비난이 아닌 의도하지 않은 패착의 가능성을 언급한 것 치고 대가는 가혹했다. 공정방송을 위해 싸운 많은 언론노동자들이 싸잡아 기레기소리를 듣기도 한다.

YTN 노조가 사장 선임 과정에서 박근혜 정권 시절 활약한 내부 적폐 세력의 건재함을 강조하고, 최남수씨의 이명박 찬양 전력들을 앞세워 비판할 때마다 새로운 난관까지 돌파해야 하는 이들의 곤혹스러움이 느껴진다.

 

한 발짝도 들어올 수 없다며 완고하게 반대했던 최남수씨에 대해 언론노조의 중재안을 받아들이며 파국을 피하고자 했던 노조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쫓겨나고 징계당한 이들이 속속 복귀하고, 해직자가 사장이 되는 드라마틱한 반전까지 만들며 앞으로 나가고 있는 이웃의 방송노동자들과 달리 YTN만 시계를 거꾸로 돌린 듯 다시 외롭게 단식을 하고, 파업 찬반투표를 했다. 역대 최대의 파업찬성률이라고 한다.

노동자들에게 파업은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마지막 선택지다. 임금을 받지 못하고, 끝을 알 수 없으며, 그 끝이 승리라는 보장도 없다. 어떤 희생을 또 치러야 할지도 가늠할 수 없다. 지난 9년 동안 파업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이들이 어게인 2008을 선언하며 다시 싸움을 시작한 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의 언론장악에 맞서 싸워온 MBCKBS 조합원들이 증언하는 중요한 감정 중에는 분노, 모멸감, 수치심, 무력감 등이 많았다. MBC 사측이 조합원들을 탄압한 방식은 상상 이상으로 명료했다. 조합원들은 동료가 해고되고, 징계를 당하고, 이상한 곳에 발령 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모욕을 견뎠다. KBS도 마찬가지. 해고자만 없었을 뿐 치욕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불의가 정의를, 절망이 희망을 압도했다.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노동조합은 계속 몰렸고 회사를 떠나는 동료들을 잡지 못했다. 다행히 촛불과 탄핵으로 정세는 급변했다. 이제 이들의 상대 쪽에는 사법처리의 심판대에 오르거나 오를 예정인 김재철, 안광한, 김장겸, 고대영 같은 선명한 악의 이름들이 있다.

 

YTN의 배석규와 조준희는 정권의 나팔수로 불리지도 않았고, ‘큰집에 불려가 조인트를 까이지도 않았다. 국정원에게 직접 공작비를 받았다는 의혹도 없다. 누가 구본홍 뒤에 들어선 배석규를 알며, 은행장 출신인 언론사 사장 조준희를 알겠는가. 이들은 네임드 악인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사장이던 지난 9년 동안 사측은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깨고 1심에서 승소한 해직자의 복직을 번복했고, 여러 방법으로 노조를 탄압했다. 이들은 밖에서 보기에 선명한 한 방은 없었지만 꾸준하게 불의했다. YTN의 조합원들은 이런 상대와 싸우면서 노조를 지켰고, 작은 조직에서 해직자들의 생계비를 책임졌다. 늘 해직자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먼저 표현했다

나는 MBC, KBS, YTN 노조원들의 인터뷰를 보며 중요하게 표현하는 감정들에서 이들이 처한 상황의 차이를 느꼈다. 선명한 악에게 각개격파의 타격을 당한 MBCKBS 조합원들이 모멸감과 수치심을 견디는 동안, YTN 노조원들은 어떻게든 노조를 중심으로 버티면서 해직자의 복직에 최선을 다해왔다. 이들이 이토록 최남수씨를 완강하게 반대하는 것은 모호한 악과 오랜 시간 싸우면서 경험한 불의의 기운을 다시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부적격자는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문에 답을 해 준 것은 오히려 최남수씨다. 뒷배에 선명하게 정권의 보호가 있는 사람보다 최남수씨 같은 경우는 스스로의 정당함에 대한 확신이 높다. 더구나 그는 한 때 선배와 동료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 YTN의 기자 출신이다. 자신을 낙하산 출신 사장들과 같은 취급을 하는 데 대해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YTN을 잘 경영해 보고 싶은 진정성도 가졌을 수 있다. 선명한 악과 자신을 동급으로 여긴다고 생각해 취임 후 추락한 명예를 회복하고 싶은 욕망도 있을 것이다.

 

그의 진심을 믿는다고 해도, 언론사의 사장으로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했다. 사적인 대화를 입수해 이를 근거로 반대자를 공격하는 행위는 그 자신 기자 출신으로서도 용납할 수 없는 부도덕한 일이다. 정당한 권위를 가진 노조 지도부를 무시하고 특정 조합원을 거론하며 대표성을 이간질 하는 방식도 틀렸다. 새로운 보도국장 지명, 해직자에 대한 일방적인 인사통보는 당사자들의 거부로 최남수씨의 리더십에 타격만 입혔다. 공정방송에 대한 노조의 의지를 믿는다면 기왕에 자신이 지명한 보도국장을 번복할 이유는 없다. 새롭게 지명된 이들은 의도치 않은 갈등의 구도 안에 들어가게 된다. 노사가 대립할 때 사측은 늘 이런 방법을 쓴다. 갈등이 뻔히 예상되는 무리한 수를 두면서 구성원들의 반대에 부딪힌 사장이 된 지금, YTN 정상화에 대한 그의 진심을 확인해줄만한 행위는 안타깝게도 없다. 9년 만에 돌아와 이제 복직 5개월도 되지 않은 해직자가 존재하는 사업장에서, 다시 징계와 처벌을 예고하는 사장이 어떻게 화합과 정상화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

 

우리 사회에 있었던 수많은 갈등 중에 패배한 적대자에게 아량을 베푼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더욱 모 아니면 도의 극단으로 간다. 퇴로를 열어주고, 마지막 품위는 지키도록 배려해주는 문화가 없다보니 어떻게든 자리를 지켜 승부에서 이기는 게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최남수씨가 선명한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태도를 고수한다면 불의라는 그라데이션에서 그는 채도 높은 악이 되는 길밖에는 없다. 그 자신도 그런 불명예를 안기는 싫을 것이다. 그의 능력과 진심을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곳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셨으면 좋겠다. YTN의 사장을 그만두어도 그의 이력이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물러나고 노조는 최소한의 명예를 지키며 그가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경험도 우리 사회가 한 번 쯤 가져봤으면 한다.

 

이사회, 방문진, 방통위 같은 기구의 정상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기에 어쩌면 가장 빨리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기대를 걸었던 YTN. 방송사 가운데 처음으로 보도국장 임면동의제를 합의하고, 사장이 공석인 상태에서도 해직기자들의 복직이 가능했던 유연성은 역으로 무주공산의 혼란에 무력한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여당 추천 인사, 야당 추천 인사를 배분하는 등 지배구조 자체가 정치권력과 합법적으로 맞닿아 있는 공영방송사들과 달리 YTN은 정권이 노골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구조다. 탄압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데 책임질 주체는 없는 기이한 상황, 그것이 YTN의 특수함이다. 그래서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사태해결에 나서주었으면 한다. 작은 사업장의 노사갈등이지만 언론이라는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기업이고, 이들이 싸우는 이유도 이 정부의 약속 가운데 하나였던 공정방송 사수와 언론정상화이기 때문이다.


해직기자 3인을 9년 만에 노사합의로 복직시키면서 YTN 노사는 해직자 복직을 계기로 향후 구성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재통합을 이뤄내 희망의 YTN으로 재도약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고 합의했다. 그들이 없는 9년을 보낸 동료들은 해직자들에게 꽃길을 만들어 주었다. 좋은 날이 오는가 싶었는데 아직 YTN 구성원들 앞에 봄은 아득하고 꽃길은 보이지 않는다. 복직 후 노조의 환영행사에서 한 해직자가 동료들의 환대에 답하며 읊조렸던 바람대로, 이 모든 진통이 끝나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시 전선에 선 YTN 노조의 싸움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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