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옥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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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라틴아메리카를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같이 잔인한 독재정권을 겪고 수없이 많은 죽음을 당했으면서도 탱고와 삼바와 살사,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라는 역설과 반전(이 대륙을 표현하는데 이 이상 들어맞는 말은 없다)을 가진 대륙이기 때문이다. 

나는 안티테제를 좋아하지 않는 쪽이라 예전부터 남미쪽 운동의 슬로건이 인상깊었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구호였던 "행복해지기를 두려워 말라" 자본가들의 잔치 세계경제포럼에 맞선 세계사회포럼의 슬로건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칠레 최초의 여성대통령 바첼레트의 "난 네 편이야" 이런 구호들이 좋다. 무엇에 반대한다, 무엇을 타도하자 보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어떤 곳인지, 우리는 어떤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지 그걸 말해주는 운동이 좋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장면에서 울컥했다. 2001년(불과 2001년의 일이다) 멕시코의 좌파게릴라와 원주민들이 결성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정글을 떠나 멕시코시티로 행진해 입성한 날 20만 명이 광장에 모였다. 이들의 안전을 지키고 연대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날아온 동료시민들과 멕시코의 민중들은 "우리는 모두 세상의 원주민들이다" 외치며 또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다.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56개 부족 원주민의 이름을 모두 불렀고, 대광장의 시민들은 "너희들은 외롭지 않다!"고 화답했다. 세 페이지에 걸쳐 묘사된 그날의 광경을 읽는데 가슴이 찡했다. 
꿈꿔왔던 세상의 완성된 모습을 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생의 어느 날 이런 순간을 경험한 이들은 완성된 미래를 보는 것만큼 벅차지 않았을까.


대륙 전체가 무장혁명운동의 기지였던 역사 속에서 게릴라 투쟁을 했던 혁명가들의 회한을 볼 때도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했지만 행복한 대통령으로 알려진 우루과이의 무히카는 게릴라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고, 쿠바의 혁명가 호르헤 파라는 "우리가 꿈꾸던 나라를 만들지는 못했다"고 했다.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괴물이 되었던 시간에 대한 회한. 
식민지, 전쟁, 독립, 해방, 쿠데타, 독재, 혁명, 좌우 교차 집권. 숨가쁘게 반전을 거듭해온 이 대륙의 역사는 역동적이면서 슬프고, 이 땅의 사람들은 애처롭고 매혹적이다.


대륙 전체가 민주주의의 거대한 실험장인 곳, 이질적인 것들이 독특하고 기이하게 공존하는 시공간. 우리에겐 볼리바리안 혁명, 차베스, 엘시스테마, 체 게바라, 포르투알레그레 시의 주민참여예산제 같은 조각들로만 알려진 이 대륙의 속살을 담담하고 풍부하게, 무엇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전해주는 저자께 고마운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닫았다. 


이런 기록이 없다면 나는 어디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아름다운 역사와 사람들을 만날 것인가.


이선옥의 방 - 짧은생각

잡다한 끄적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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