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옥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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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후원처를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데 액수가 몇 십만원이나 백만원 단위를 넘을 때도 있다. 얼마 전에도 꽤 큰 돈의 후원처를 고민하는 분한테 추천 의뢰를 받았는데 고민 끝에 다섯 곳을 추천해드렸다. 사이트를 링크해서 간략하게 단체 소개를 하고, 내가 이 곳을 추천하는 이유를 설명해서 드렸더니 만족해 하셨다. 진짜 후원으로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할 일은 거기까지.

의뢰인한테 후원처를 추천한 기준은 아래 네가지였다. 

 
-웹사이트에 활동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고
-후원금에 대한 영수증 처리가 시스템화 되어 있고
-같은 영역에서 갈등하는 다른 단체가 있지 않은 곳
-특정한 이슈파이팅이나 정파성이 도드라진 곳보다는 보편의 이슈에 대해 활동하는 곳


여러 곳을 둘러보면서 한국의 운동단체들을 두루 살펴보게 됐는데, 예전보다 여러 영역에서 활동이 더 세분화한 변화가 보였다. 또 어떤 이름들은 이전에 망설임 없이 추천했을테지만 이젠 안하게 된 곳도 제법 있었다.

후원처를 추천하면서 내가 기준으로 삼은 가치는 '인권' '평화' '공익' '한국을 넘어 다른 세계로 확장하는 연대' '치유와 지속성' 같은 개념이었다. 후원자도 거부감이나 문턱 없이 동의할 수 있는 보편의 가치라고 생각해서다.

남의 돈 쓸 곳을 추천하는 거라 내가 후원하는 것보다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됐는데, 나라는 필터로 어떤 곳을 판단해야 하는 거니깐 이 기준은 곧 의뢰인에게 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개념과 가치관을 가졌는가, 단체들을 둘러보면서 그런 것도 돌아보게 됐다.


내가 끝까지 고민했던 단체의 얘기를 해보자면,

국제인권단체의 한국지부는 작년에 한 매체와 진행한 '그것은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캠페인 때문에 망설였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이렇게 반박해라 하는 Q&A식의 운동은 정답을 정해두고 강요하는 방식이라 사유와 비판의 가능성을 막는다. 나는 그런 방식이 가진 반지성주의를 경계한다. 그 캠페인에 뜨악해서 심각하게 후원을 중단할까 생각했었다.


공익사안에 대해 법률지원 활동을 하는 한 센터는 상대의 실명을 거론해 데이트폭력을 폭로한 여성을 공익소송으로 무료 변론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망설였다. 내 판단으로 그 사례는 사적인 복수이며 한 쪽의 주장만을 근거로 한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명예형을 당하는 사례들을 강자/약자의 구도로 단순해석해서 옹호한다면 오히려 공익과 인권의 후퇴를 가져온다고 봤다. 그렇지만 이 사안은 단체에 소속된 변호사 개인의 행위인지, 센터의 공식결정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언론운동 분야를 고민하다가 단체가 한 곳이 아닌데다 때론 서로 갈등을 하기도 하고, 사안별로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하니까 추천하기가 애매했다. 또 특정 정권에 대한 친밀도가 강해보여서 그것도 고민사유가 됐다.

내 판단이 객관적인지, 합리적인지 고민을 많이 했다는 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데, 많이 아쉬운 점은 정말 내가 권하고 싶은 곳은 추천할 수 없다는 것.


개인적으로는 노래와 춤을 좋아하고 내가 오랜 세월 함께 했던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준 '꽃다지' 같은 곳을 추천하고 싶었다. 현장의 문화예술인들은 낮은 대가를 받으면서, 가장 힘든 곳에 달려가고, 아무도 없을 때 현장을 지켰으면서, 모두가 함께 하는 순간 빛나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 그걸 숙명처럼 안고 사는데, 재정난에다 스스로의 변화를 위한 고민까지 해야 하는지라 안타깝다.(여러분 꽃다지 후원해 주세요 http://ihopesong.tistory.com/315)

하지만 내 기준으로 그렇지 내 현장이 의뢰인에게는 현장이 아니며, 이들의 당파성이나 계급성은 대중에게는 문턱인지라 설명을 하기가 어려웠다.


추천 의뢰를 받을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어떤 운동(단체)이든 간부나 활동가 뿐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대표성을 가진다. 해당 운동의 구성원이 내가 동의할 수 없는 행위를 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 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자신이 선택한 운동과 단체에 대해 소속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만큼 신중하고 책임있게 행동하는 게 필요하다. 사려깊고, 합리적이고, 또 발랄하기까지 하면 더 좋고. 

내가 속한 곳이 나를 말해주고, 나는 내가 속한 곳을 대표한다.


(그래서 나는 민폐 안 끼치려고 좋아하는 곳에 후원만 하면서 산다.)


이선옥의 방 - 짧은생각

잡다한 끄적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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