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옥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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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을오토텍 변론과 MBC 시용기자 옹호. 기시감>

형사소송은 기본적으로 국가 대 개인의 구도이기 때문에 구조상 약자에게 '변호인'의 조력이 필수고 권리보장 차원의 문제가 된다. 민사소송은 대등한 개인들 사이의 분쟁이라는 구도가 전제이기 때문에 변호사는 원고든 피고든 소송 당사자의 법적 '대리인'의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민사소송은 쿨한 분쟁일 뿐 권리보장의 문제가 아닌가 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노조의 민사소송은 파업, 부당해고, 임금체불, 가처분 등등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와 관련된 사안이 대부분이다. 노조 대리와 사측 대리를 대등한 사인간의 쿨한 법적대리인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노조는 파업 등 쟁의를 하면 일단 업무방해로 형사소송을 당하기 때문에 민형사 소송이 함께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오가는 비난들을 보면 형사변호와 민사대리의 개념이 섞여서 어긋난 공방이 이어진다.

박비서관의 행위에 대해 "아니 변호사가 수임한 사건 변호하는 게 왜 문제냐, 기업 변호하는 게 뭐가 문제냐 그건 변호사의 일인데" 라고 말하려면,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대해서도 "노조가 자신들의 권리인 파업을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똑같이 쿨한 태도를 유지하는 게 일관되다. 각자 자기 일 열심히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라는 태도라면 그렇다.

누구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고, 쓰레기같은 인간도 똑같이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 차원의 문제라고 주장한다면, 노조의 기본권이 파괴된 상황에도 문제의식을 가지는 게 일관되다.
갑을오토텍은 부당노동행위, 파업방해, 노조원 폭행, 노조파괴 등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헌법상 기본권을, 매우 공격적인 방식으로 무력화시킨 노동기본권 파괴의 백화점같은 사업장이다.
변호인으로서 조력받을 권리를 옹호한 기본권 보장차원의 행위니 문제없다고 방어하려면 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기본권을 대하는 일관되고 올바른 태도다.

또 한 가지, 해당 로펌에 고용된 을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무력한 갑을 관계 속의 약자로 그를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박 아무개 비서관의 경우에 해당되는 얘기는 아닌 것 같다. 로펌의 구성원 변호사는 정 하기 싫거나 부담인 소송은 피할 수 있다고 알고 있다.

이 사안을 보며 2012년 MBC 파업 때 시용기자를 두고 오갔던 시민들 사이의 공방이 떠올랐다. 그 때 썼던 글이다. 박아무개 비서관에 대한 임명이 맞다, 틀렸다는 결론을 얘기하고자 하는 글은 아니다. 어떤 사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기준, 원칙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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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중인 MBC 노조원들 대신 대체인력으로 투입한 비정규직 ‘시용기자’ 한 명이 올림픽 중계방송에서 미숙한 진행으로 물의를 빚었다. 이에 대해 정규직 노조원인 MBC 기자가 “해당 기자는 파업 때 채용된 비정규직”이라 말했다가 트위터에서 집중 포화를 맞았다.

“정규직이 그런 실수를 하면 괜찮고, 비정규직이 실수해서 문제인가,”,
“정규직 기득권의 오만한 발언이다.”
“인터뷰한 사람이 무슨 죄인가, 인터뷰어가 계약직인 게 무슨 상관이냐”

등의 비판과,

“이 고용 불안 시대에 MBC의 시용기자에 지원한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며, 회사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는 절대약자인 이들의 행위를 비난해선 안 된다”는 옹호로 이어졌다.

결국 문제의 발언을 한 정규직 기자는 사과를 했다.
정규직 기자를 비판한 사람들 상당수는 MBC의 파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시용기자가 기본적으로 노조의 파업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투입한 대체인력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너그러움을 보였다. 이는 시용기자라는 파업 파괴 인력에 지원한 개인의 사회의식보다는, 먹고사니즘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현실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작용한 결과다.
이런 인식은 시용기자 채용으로 파업을 파괴하려는 회사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비판이 아닌 직장 내 정규직 대 비정규직의 갈등 구도로 사태를 바라보게 했다.

“그들은 회사가 까라고 하면 까야 하는 힘없는 계약직이다”라는 말은, 행위 당사자로서 그들의 주체적인 선택과 행위를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다. 우리는 MBC 노조의 파업을 왜 지지했는가? 언론의 자유와 그것이 지켜 줄 민주주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파업을 제대로 보도해야 한다는 지성을 가진 이들이 파업 파괴 인력을 먹고사니즘으로 옹호하는 사태는 어떻게 봐야 할까?

그런 자리라도 택할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들을 욕해선 안 된다면, 먹고사니즘 때문에 파업을 파괴하고, 권력에 순응한 노동자들에 대해서 비난할 수 있을까? 취업 앞에선 용역깡패도, 파업 대체 인력도 모두 까방권이 되어야 할까? 먹고사니즘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인식이 결국 이명박의 당선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먹고사니즘을 생각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공염불일 터이다.

MBC의 정규직 조합원들도 회사와의 관계에선 약자다. 파업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가 가진 최고의 투쟁 수단이며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다. 이를 파괴하기 위해 대체인력을 투입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일이다. 시용기자는 그런 기본적인 사회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언론인이 된다는 뜻이다.
파업을 파괴하고자 채용한 대체인력이 투입된 방송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제대로 보도되거나, 권력에 비판적인 방송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교통 불편이나 읊어대는 보도 말고, 노동자들의 파업이 언론에 보도되기를, 그것도 제대로 보도되기를 바라던 이들마저 “평소 원하던 언론인 자리에 기회가 왔고 이에 응해서 시용기자가 된 걸 왜 욕하느냐”고 파업 대체 인력을 옹호한다면 이들이 원하는 언론의 자유는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언론인은 다른 어느 직종보다 민주주의에 민감해야 하는 분야 아닌가. 먹고사니즘에 별 문제 없었던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존을 걸고 파업을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고, 우리는 그래서 그들을 응원하는 것이었으니까.

구조 안에서 개인의 선택은 제한적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사회의 문제를 개인이 아닌 구조의 문제로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하고, 그런 훈련에 사회구성원들이 익숙해질수록 개인의 선택들의 총합이 더 나은 민주주의로 나타날 것이다.

국가기구의 하위관료인 ‘나’는 폭력진압 명령에 복종해야 하지만, 민주주의와 평화에 기여해야 하는 시민으로서 ‘나’는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위험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는 인식,

고용불안 시대의 약자인 ‘나’는 당장의 생계를 위해 시용직에 지원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가 먹고사니즘을 해결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는 ‘나’는 파업을 파괴하는 대체 인력 투입을 거부해야 한다는 인식.

그것이 결국 구조 안에서 개인의 행위를 용인 받을 수 있는 평가 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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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파괴 사업장을 변호한 이의 반부패비서관 임명과 그를 둘러싼 공방, 민주노총 총파업을 두고 새정부 지지자와 노동조합 옹호자들의 날선 분노를 보며 이 고민을 다시 하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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