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옥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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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즐겨 보던 TV 프로그램 중에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가 있었다. 자신의 일에 능숙한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보고 있으면 정말 입이 떡 벌어졌다. 능숙이라는 표현은 부족하고 거의 신의 경지에 올랐달까.

달인들은 각종 공장부터, 농어촌 마을의 작업장, 허름하고 분주한 식당 같은 곳까지, 거의 모든 노동 현장에 존재한다. 머리에 쟁반을 몇 층씩 쌓아 올린 채 유유히 인파를 헤치고 밥 배달을 하는 달인, 매의 눈으로 불량품을 잡아내는 달인, 뭘 던지면 기가 막히게 필요한 곳에 가서 꽂히는 던지기 달인, 종이봉투 접기의 달인, 셀 수 없이 많은 일터에 달인들은 낮달처럼 숨어 있다 별처럼 빛났다. 그들의 기능을 테스트 하기 위해 어려운 미션들이 주어졌을 때, 달인들이 그걸 기가 막히게 성공시키면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곤 했다.

 

나의 좌파 친구는 그 프로그램을 싫어했다. 화면 속에는 열악한 환경들이 자주 보였고, 유해한 물질을 다뤄야 하는 공정이나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경우들도 제법 있었다. 달인들의 몸은 상처가 나 있기도 하고, 반복된 노동으로 신체 일부가 기형적인 모습이 된 경우도 있었다. 친구는 장시간 노동,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노동자들의 실제 삶을 가리고, 화면 너머의 진실을 왜곡하는 프로라고 비판했다. '프로불편러'다운 태도다.

나도 좌파이던 시절이니 달인들의 닳아빠진 손끝, 공장의 열악한 환경, 생산성과 비례하지 않은 임금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불편함들보다 달인들의 표정, 고유하게 몸에 밴 태도들이 먼저 들어왔다, 넉넉함. 편안함, 선함. 이런 것들.

그들은 아무와도 경쟁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대부분 자신의 월등한 능력으로 같은 시간에 동료들보다 몇 배나 되는 일을 해냈다. 손이 모자란 동료의 자리에 가서 기꺼이 모자람을 채워 주고, 동료들은 또 찬사와 우정으로 답하고. 날마다 봐도 질리지 않은 달인들의 능력이 늘 그 일터에서는 화제였다.

,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저런 얼굴이 나오는구나.. 하나 같이 넉넉하고 선한 분위기가 똑같아서 신기하고, 그 기운이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것 같아서 좋았다. 결론은 나는 이래서 좌파를 못하는구나.

 

좌파는 불편함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불편을 감지하고 불편함을 주장하는 것이 사회를 이롭게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들의 항변이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낸 경우도 많다. 좌파는 매의 눈으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감지하고 그것의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TV프로그램 하나라도 아무 생각 없이 넋 놓고 보다가는 진짜 넋을 빼간다는 경고를 보낸다. 나도 매사불편러이던 시절 그랬다. 그래서 요즘 매사불편러들의 피씨함(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강박이 왜 생기는지, 어떻게 발현되는지 그 사고의 과정을 잘 안다.


하지만 그들이 놓치는 게 있다. 그들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통제하려 들 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달인에 대한 찬사 속에 가려진 열악한 노동조건과 구조의 문제는 눈에 들어올지언정, 정작 그 노동 속에서 자신의 존엄과 행복을 느끼고 사는 달인이라는 개별 인간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인간은 조금 못나고, 돈을 덜 주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불합리한 면이 있다 할지라도, 그와 별개로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손끝이 문드러지고, 손가락이 휘어지면서도 자신의 기능을 연마하는 걸 멈추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손에 자부심을 느길 수도 있다. 그런 인간이 또 어쩌다 노조를 하기도 하고, 가족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사장의 측근이 되어 노조를 방해 할 수도 있는 거고.. 인간은 그렇게 다양한 존재이며, 같은 환경에 있다고 해서 똑같은 인식을 하지도 않는다. 얼마나 모를 존재인가 인간이란 종은.

 

저 사람은 나를 왜 좋아하는지, 저 사람은 왜 나를 싫어하는지,

나는 저 사람이 왜 좋은지, 그 사람은 왜 나를 떠났는지(?)

나는 여전히 왜 그 사람이 좋은지(얼씨구)

왜 아무 것 아닌 일로 싸우는지,

왜 저만한 일에 저 정도로 화를 내는지. 왜 죽는지, 왜 저런 식으로 사는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는 게 인간이란 존재다. 그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말은 공허하고 위험하다.

 

해외의 아동을 후원한다고 하면 국내에도 어려운 애들 많은데 왜 외국 애들을 후원 하느냐고 하는 사람들 있다. 북한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쌀을 보내자고 하면, 한국에도 굶는 애들 많은데 왜 북한 애들을 돕느냐고 반대하고, 부잣집 애들까지 왜 공짜밥을 먹이냐며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좌파들은 기부행위나 자원봉사 같은 행위를 비판한다. 해외 아동과 자매결연을 하면 그런 원조가 사태의 원인인 제국주의자들의 본질을 가리기 때문에 문제라고 한다. 기부와 시혜는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모순을 지탱하는 사악한 장치라고 비판한다

이건희 손주까지 왜 공짜밥을 먹여야 하느냐고 분개하는 이웃을 실제로 봤다심지어 자기 아이가 무상급식의 대상인데도 그런다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언제나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게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꼭 그렇지도 않았다눈앞의 이익을 포기하면서도 자기 신념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인간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존재다

공짜밥을 트집 잡는 우파나, 자선과 기부를 문제 삼는 좌파나, 서로가 서로를 매사 트집 잡는 불만세력으로 취급하는 건 같다. 거울쌍이다. 당장 물한모금이 절실한 내전국가의 아이한테 몇 만원을 후원하면서 제3세계의 해방과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고, 이건희의 손주까지 공짜밥을 먹을지언정 더 많은 아이들을 위해 인정할 수도 있는데, 그 둘이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편협함도 비슷하고, 인간의 선한 의지를 자신의 이념에 맞춰 재단하고 그걸 타인에게 강제하려는 폭력성도 비슷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영역이 요즘은 특히 노인들에 대해서다. 태극기 집회에 나가는 걸 단순히 일당벌이로 보는 시선, 소외돼서 불쌍해진 존재들의 외로운 인정투쟁으로 보는 동정적인 태도 둘 다 동의하지 않는다. 혐오와 동정, 모두 자신의 분석틀에 대상을 맞추려는 태도다. 목적론자들이 흔히 가지는 태도이기도 하다. 촛불을 든 자신은 신념에 의한 행동인데, 태극기를 든 노인은 일당에, 혹은 삐뚤어진 사고 때문에 나온 좀비로 취급한다. 그 중장년, 노년들 개인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가진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성혐오보다 노인혐오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혐오를 개념화하고, 권리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자기방어용 무기들이 있지만, 노인들은 그걸 가지지 못했다. 장년층 남성을 포함해서 노인이 환영 받는 경우는 동세대를 혐오하는 '나빼썅'의 경우 말고는 없다. 노인들은 부끄러운 줄 알고 입을 닫아라! 꼰대짓 하지 말고 지갑이나 열어라! 그런 류의 말. 자아 비판이나 동세대 혐오와 비난을공공연하게 하면 개념노인, 탈꼰대 사이다가 된다. 그런 감을 갖지 못한 장년층 아재와 노인은 그냥 반도의 흔한 '틀딱'이다. 


피씨함이 거둔 많은 성과에도 그것이 두려운 이유는 사람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좋은 가치들을 죄악시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가진 특유의 열정, 도전 정신, 노인의 지혜와 경륜, 직장동료 사이에서만 가질 수 있는 끈끈한 유대, 그리고 이성이든 동성이든 끌리는 대상을 향한 정념, 욕망. 이런 것들을 피씨함에 가둬서 정형화한다. 그들이 이루려는 사회의 총합은 내게 파시즘적인 '무균세상'으로 연상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참 어렵다. 단박에 되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은 언제든 가능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 과정이다. 이해는 하되 관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관용하지 않는다면 어떤 선부터인가?  나에게는 그 기준이 존재하는가? 그 기준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있는가, 내 기준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가? 내 기준을 확장시킨다면 타인의 자유와 권리가 더 확장될 수 있는가? 이런 고민은 언제든 가능하다. 


달인을 욕하는 좌파 친구의 얼굴이 낯설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런 고민을 시작했다. 달인 곁에서 해맑게 웃는 나쁜(놈인지는 알 수 없는) 사장놈을 무작정 비난하기 전에, 나는 이 세상에 대해 얼마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개인인지 문득 의심이 들었다. 낯설어 보이는 좌파 친구들을 포함해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말의 책임도 무섭게 느껴진다.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아마 평생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원칙을 정하고 그걸 지키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섣불리 비난하지 않고, 인간을 수단화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타인의 삶을 제물로 삼지 않을 것. 불편러의 삶보다 훨씬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내 양심과 충돌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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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은우 2017.03.04 19:49
    안녕하세요 우연히 글을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글이 굉장히 가독성이 높고 흥미로운 주제여서 정말 즐겁게? 읽었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내용에 동의하지만 여혐보다 노인혐오가 더 심하다는 내용은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보고싶습니다. 저 역시 '틀딱'이나 조금만 나이를 먹어도, 예를 들면 22살만 넘어도 서로를 새내기가 아닌 사람의 의미로 쓰레기, 화석, 할배, 할매미로 부르는 걸 보며 노인혐오는 지나치게 일상화 돼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혐과 노인혐오가 다른 관점이라고 생각하는 건 다음과 같은 이유입니다. 남녀 모두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됩니다. 남자는 여자가 되지 않아 여혐을 겪을 일이 없고, 백인은 동양인 흑인이 될 일이 없어 인종차별을 겪을 일이 없습니다. 남녀 모든 사람들은 죽지 않는 이상 노인이 되어 약자의 삶을 살게됩니다. 그것이 여혐이 노인혐오와 다른 차원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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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인 2017.03.10 09:23
    강북좌파- 습관성 투덜러 -가 이선옥 작가에게

    좌. 우를 넘나들며 조변석개로 일관되게 소수파의 입장만 강변하는 청개구리적 비판러일수도, 아니면 진실한 휴머니즘 없이 말로만 인간애를 외치는 허울뿐인 인본주의자, 이도 아니라면 흔히들 다분히 조롱섞인 definition으로 다가서는 습관성 투덜러라는 의미?의 강북좌파일지도 모를 내가 이선옥 작가에게 답해보고 싶다.

    이선옥의 주장 요지는 아래와 같다. "뭐든 불편함을 제기하는 프로불편러인 좌파는 숙련된 달인조차 불편해 한다. 왜? 낙후된 작업장, 정비되지 않은 작업환경, 숙련된 경험에서 오는 가슴저리는 부상 내지 몸에 남은 노동의 훈장이 자본주의의 노동현실을 미화시키는 왜곡을 하기 때문에.  좌파는 불만을 제기하여 변화를 이끌기도 하지만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고 자기 목적에 맞게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통제하고 해석하고자 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없이 세상을 바꾼다는것이 얼마나 공허하고 위험한 일인가? 그들은 인간애에 기반한 자선, 기부조차 반대한다. 이러한 행위가  모순을 시정하는게 아니라 제국주의를 유지하는 장치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매우 어렵다. 평생 노력해야 할 일이다. 좌파들이여. 섣불리 비난하지 않고, 인간을 수단화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타인의 삶을 제물로 삼지 말라. 좌파인 불편러의 삶보다 이것이 훨씬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내 양심과 충돌하지는 않는다."

    이선옥 주장에서 인간애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물을 인식하자는 취지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선옥의 주장과 글에서 비판할 만한 부분들도 많다.

    네가 좌파를 아느냐?

    한때 좌파라고 고백했던 이선옥은 정말 좌파였을까? 어쩌면 그는 좌파를 혁명사상으로 점철된 사이보그같은 비인간적 존재-인민군복에 따발총 내지는 칼라시니코프 AK47 돌격소총을 휘두르며 무산계급에 붉은 사상을 열변하는 직업적 혁명가-, 인간애를 찾아 볼래야 볼 수 없는 한국적 반공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지하 선동가를 그리는 것은 아닐런지? 혹은 90년대 세미나를 빙자해서 스스로 어설프게 정제시키지도 못한 변유. 사유를 후배들에게 기계적으로 주입시켰던 선배의 모습으로만 이해하는 건 아닌지...
    약자를 궁휼히 여기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사회변혁을 고민하고 끝내는 그 최후의 수단이 더이상 모순이 극대화되어 비약적 변화가 불가피한 순간 자본주의는 스스로 무너진다는-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 붕괴는 반드시 폭력혁명을 의미하진 않는다.- 궁극의 혁명론에 인간애가 배제된다면 도대체 왜 체제를 바꿔야 하는 문제의식이 태동할까라는 좌파적 문제제기와 이해가 부족한 듯 하다. 해서 우리가 치기어리게 경험했던 20~30대 그 시기에 마르크스는 헤겔. 포이에르바하. 프루동을 넘어서는 진정한 과학적 사회주의자의 길로 들어서면서도 그 기저에 16시간 이상 살인적 강도로 노동해야 하는 어린 노동자의 삶에서 자본주의의 노동의 소외를 유리시켜 인간 본연의 해방을 갈구했던 것이다. 내가 마르크스를 Saint Marx로 부르는 이유이고 인본적 사회주의자로 이해하는 배경이다.
    좌파야말로 인간애를 기저로 하지 인간애가 없는 좌파라면 그는 좌파의 탈을 쓴 프로불편러일뿐이다.

    이런 서투른 인식으로 이선옥은 이런 저런 예들을 두서없이 인용하면서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잣집 아들에게 무상급식을 주는 것조차 좌파들이 반대한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끔 한다. 이런 문단배열이 의식적으로 배치한 것인지 아니면 좌파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방향성없는 부적절한 예를 든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김어준을 싫어한다. 아니, 예전의 애정을 버렸다. 나꼼수 시절의 자연인으로서의 절박함, 세상을 바꿔보자는 정열에서 파파이스로 발전하면서부터는 좀더 세련된 상업화, 점차 진보매체에서 자기 지분을 갖는 기득권적 행태, 비판을 위한 비판적 주제선정 등 초창기 총수 모습이 아닌 권력화된 교주의 권위를 느꼈기 때문이다. 과장하자면 동북항일연군의 항일투사 김일성이 위수김동으로 바뀐 느낌이랄까?

    굳이 비난하지 않아도 될 이슈조차 비판하는 나는 쓸데없는 전문 투덜러이다. 그러나 굶어죽을 자유조차 자유라고 강변하는 극우적 자유주의자들과 고아원 봉사활동을 제국주의의 통치연장으로 이해하는 수구적 사이비 좌파들 모두 적으로 돌려야 하는 인본적 사회민주주의자로서 30년전 고아원으로 봉사활동가자던 공무도하가 백수광부의 여인에게 냉정하게 거절했던 것은 치기어린 그 시절, 봉사활동에 스스로 자족할까 저어했던, 이제와 돌이켜보면 부끄러움이었을 자기 경계심의  고백이었다는, 그래서 마음아파했던 그 친구에게 평생을 두고 미안함을 지금도 간직한다.

    노동야학이니 검정야학이니 야학의 이념논쟁에서 내가 유일하게 믿었던 가치는 '교육은 목수가 아닌 농부이다. 내가 학생을 깍고 다듬는게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서도록 옆에서 지켜주는 파수꾼이다'라는 교육관이었다. 여기에도 인간애가 있지 않았을까?

    여의도를 거닐다 보면 80년대 운동가요가 심심치않게 들린다. 아는 노래들이어서 흥얼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노래가 2017년에 어울리나? 아직도 이 노래라면 진보는 옛날 방식에 갇혀 세상을 보는 것은 아닐까? 라는 섬찟함과 두려움을 느끼는 세대가 되었다. 변화를 전제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변증법적 유물론자라면 마땅히 시대변화에 맞게 사고하고 답해야 한다. 박제가 안되려면 평생 다양성과 새로움을 학습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본주의가 여전히 그 바탕에 있어야 한다.

    워렌 버핏,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의 기부와 재단활동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이자 역사상 가장 보수화된 미국을 유지시키는 힘이다. 그러나 카네기, 록펠러처럼 20세기 초 미국을 지배했던 초거대 독점기업의 부를 반독점법으로부터 세습시키는 수단으로써 재단을 활용하여 간접적이나마 자본주의하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라는 근원적 모순을 공고히 유지시킨 수단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재단의 선행을 폄훼할 필요는 없지만 그 뒤에 가려진 재단의 본질도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아스팔트 할배로 혐오받는 노인세대는 어떠하랴. 일제 수탈과 전쟁으로 척박했던 시절을 가꾸고 성장시켰던 그 세대의 희생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 세대에서 북한은 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집회 참석한 대가 여부와 상관없이 그분들이 구국의 열정으로 참여한 그 선의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악용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수 없듯이 애국심 하나만으로 오롯이 그 선의를 이해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세대를 위한다는 나라사랑어머니연합 회장이 공권력에 대해 테러를 조장하는것을 비판하는게 단지 노인혐오라면 이선옥의 본말을 전도한 셈이다.

    이선옥은 인간을 전제로 변화를 논했음에도 혹시 아직도 90년대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런지. 그녀가 꽉막힌 감옥에서 탈출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선옥의 방 - 짧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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